재무상도 일본은행 총재도 "장을 제가 안봐서" 고백…왜?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2-06-29 09:03  


"저도 슈퍼는 가지만..기본적으로 (장은) 집사람이 보기 때문에.." (6월3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장은 안보지만 미디어에서 소개하는 시민들이나 주부의 목소리들을 통해 (물가상승을) 실감하고 있다" (6월10일 국무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스즈키 준이치 재무상·아래 사진)


지난 13일 달러 당 엔화 가치가 135.22엔으로 24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자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재무상과 일본은행 총재가 잇따라 "장을 제가 안봐서.."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발단은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의 지난 6일 강연이었다. 이 자리에서 구로다 총재는 "일본 가계의 가격인상 허용도가 높아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최근의 물가상승과 가격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는 도쿄대 조사결과를 근거로 들었다. '단골가게에서 늘 사던 상품 가격이 10% 오르면 다른 가게로 가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다른 가게로 가겠다'는 응답자 비율이 작년 8월 57%에서 올 4월 44%로 낮아졌다. 이를 두고 구로다 총재가 '일본인들도 물가상승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라고 진단했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비난이 쏟아졌다. 구로다 총재는 다음날인 7일 오전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해명하고, 오후 총리관저에서 열린 경제재정자문회의 이후 기자단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죄했다. 그도 모자라 8일 결국 발언을 철회했다.


구로다 총재의 발언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건 최근 엔화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발언 다음날인 7일 달러당 엔화 가치는 133엔으로 20년 만의 최저치로 떨어졌다. 13일에는 135.22엔까지 떨어져 1998년 10월의 147.64엔 이후 24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엔화 가치는 올 들어서만 10% 이상 하락했다. 주요국 통화 가운데 가치가 가장 크게 떨어졌다.

엔화 환율은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지난달 미일 금리차가 줄어들었을 때는 엔화 가치가 완만하게 오르면서 환율이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지난 10일 미일 금리차(2년 만기 국채 기준)가 3.1%포인트로 2018년 11월이래 처음으로 3%를 넘자 엔화 가치가 추락했다.


헤지펀드를 비롯해 글로벌 투자자금이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면서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국제통화연구소가 물가와 경제상황을 고려해서 분석한 엔화의 이론가치는 110엔이었다. 실제 환율(135엔)보다 23% 평가절하돼 있다. 1973년 데이터 집계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폭의 괴리다.

엔화 급락으로 고통받는 건 일반 서민들과 일본 전체 기업의 99.7%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이다. 세계 2위 자원 수입국인 일본은 원자재 가격 상승이 경상수지 적자를 악화시켜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떨어진 엔화 가치로 인해 원자재값 급등의 충격이 증폭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현재 국제유가(배럴당 약 120달러)는 엔화 가치가 지금과 비슷한 수준인 1998년보다 8배 높다.

1년 전과 비교해 일본의 수입 물가는 사상 최대폭인 40% 이상 오르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의 4~5월 물가상승률은 2.1%로 일본은행의 목표치인 2%를 넘었다. 임금이 오르지 않는 일본에서 물가가 이렇게 오르자 실질적인 소득이 줄어들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4월 실질임금은 1년 전보다 1.2% 감소했다. 가격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인 대기업들은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올려서 버틸 수 있다. 반면 대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를 기반으로 사업을 하거나 살아가는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한계 상황에 몰리고 있다.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2022년 5월 일본의 기업도산건수는 517건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2.1% 많았다. 기업도산이 1년 전 같은 기간을 웃돈 건 사실상 2020년 7월 이후 처음이다. 100엔숍, 목욕탕, 세탁소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게들이 주로 문을 닫았다.

올해 상장 식품회사들이 가격을 인상한(인상 발표 포함) 제품이 1만개를 넘었다는 조사도 나왔다. 먹거리란 먹거리는 전부 올랐다는 의미다. 지난 30년간 물가가 오르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생활용품과 식품 가격이 이렇게 오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충격과 부담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로다 총재는 "가계의 가격인상 허용도가 높아지는 것은 지속적인 물가상승을 목표로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변화"라고 발언했다. 조금 거칠게 해석하면 "물가가 오르기만 바라고 있었는데 일본은행 입장에서는 정말 잘됐다"라는 뜻이다.


온라인에서"'가난한 사람은 죽어'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지금 서민은 가격인상을 허용(許容)이 아니라 강요(?要·둘다 일본어로 '교요'로 비슷하게 발음한다.)당하고 있다. 착각하지 말라"는 비판이 쏟아진 이유다.

문제가 된 구로다 총재의 발언은 개인적인 생각이라기보다 일본은행, 나아가 일본 정부의 공통된 생각으로 봐도 틀리지 않다. 구로다 총재는 2013년 4월 취임 직후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도입한 아베노믹스의 선봉장이다.

2016년에는 세계 최초로 마이너스 금리 정책도 도입했다. 목표는 단 하나, '물가상승률을 2%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해 일본을 지긋지긋한 디플레이션에서 탈출시킨다'이다. 돈을 무제한으로 풀어 기업 실적을 개선시키면 임금 인상, 소비 진작, 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하지만 10년간의 대규모 금융완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은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세계적인 금리인상 움직임과 반대로 엔화 약세를 감수하면서 일본이 금융완화를 유지하는 이유 역시 경기가 좋아져서 물가가 오르는 것이다.


구로다 총재도, 일본은행도, 일본 정부도 인플레를 내심 반겼던 이유다. 이 반가움이 "가계의 가격인상 허용도가 높아졌다"라고 표현됐다. 거시경제 측면에서 틀린 말이 아니지만 고통받는 서민들에게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구로다 총재와 일본은행은 '일본인들이 현재의 물가상승을 충분히 견딜 수 있다'라고 분석한다. 근거로 드는게 강제저축이다. 강제저축은 원래라면 사용됐겠지만 코로나19로 외출과 소비가 제한되면서 예금에 묶여 있는 돈을 말한다.


2021년 4월 일본은행의 '경제·물가정세의 전망(전망리포트)'에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 이 때만 해도 20조엔이었던 강제저축은 올 3월말 55조엔으로 2.8배 불었다. 일본 GDP의 10%에 달하는 규모다.

일본은행은 "코로나가 수습되면 소비자들이 강제저축의 일부를 사용하면서 개인소비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물가가 일시적으로 올라도 강제저축이 완충 역할을 해서 괜찮을 것이라고도 분석한다.

하지만 일본은행 통계에 따르면 강제저축의 80%인 45조엔은 연수입(세대 기준)이 800만엔 이상인 고소득층이 갖고 있다. 일본의 1세대 당 연 수입은 400만엔을 조금 넘는다. 연수입이 400만엔 미만인 세대의 강제저축 비율은 1%에 불과하다.

대규모 금융완화 덕분에 주가가 오르면서 부유층의 자산은 더 늘어난 반면 영업단축, 휴업, 휴직 등에 내몰린 서민들은 있던 저축도 헐어서 쓴 탓이다. 실제로 총무성의 4월 가계조사에 따르면 2인 이상의 세대가 한 달 동안 사용한 돈은 30만4510엔으로 1년 전보다 1.7% 줄었다. 물가가 오르자 불안해진 사람들이 소비를 더 줄인 결과다.

구로다 총재는 고소득층에 몰려있는 강제저축을 근거로 "일본인들이 물가상승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강제저축이 있어서 괜찮다"라는 진단을 내놨다. 엔화 급락이 대기업과 부유층, 중소기업과 서민들을 갈라치기하는데 일본 중앙은행 리더는 현실감각이 결여된 인식을 갖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스즈키 준이치 재무상이 "장은 제가 안보지만.."이라고 해명한 것도 '나랏님들은 완전히 딴 세상에 산다'는 서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는 제스처로 해석된다.

대다수 전문가들도 일본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는데 동의한다.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국내총생산(GDP)이 코로나19 확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다음달 10일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 정부 입장에서 엔저와 물가상승은 방치할 수 없는 과제다.

결과적으로 일본은행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면서 물가도 잡는 과제를 안게 됐다. 난로를 활활 태우면서 체감온도는 뜨겁지 않아야 하는 모순된 숙제를 구로다 총재의 일본은행이 풀어낼 수 있을까. 해법에 따라 일본 경제의 방향과 일본인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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